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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부라야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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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부라야 에이지는 1901년 일본에서 태어난 영화 특수 촬영 기술 감독이다. 그는 1919년 영화계에 입문하여 촬영 기사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37년 도호 영화 주식회사에 입사하여 특수 촬영 기술의 중요성을 알렸다. 그는 '고질라'(1954)를 비롯한 여러 괴수 영화에서 특수 촬영을 담당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울트라맨'(1966) 시리즈를 제작하여 "특촬의 신"으로 불렸다. 그는 1970년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과 기술은 일본 특수 촬영 영화와 텔레비전 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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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부라야 에이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0년의 쓰부라야
1960년의 쓰부라야
본명쓰무라야 에이이치
출생일1901년 7월 7일
출생지후쿠시마현 스카가와시
사망일1970년 1월 25일
사망지시즈오카현 이토시
국적일본
학력도쿄 간다 전기공업학교
직업특수 효과 감독, 영화 감독, 촬영 기사, 각본가, 편집가, 텔레비전 프로듀서, 사업가, 발명가, 비행사
활동 기간1919년 – 1969년
활동 내용특수 촬영 영화의 특수 촬영 연출, 특수 촬영 텔레비전 영화의 제작, 감수
배우자쓰부라야 마사노 (1930년 결혼)
자녀4명, 쓰부라야 하지메, 쓰부라야 노보루, 쓰부라야 아키라 포함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안장 장소가톨릭 후추 묘지, 후추시, 도쿄도
직함쓰부라야 프로덕션 사장
친척아오도 덴젠 (조상), 쓰부라야 히로시 (손자)
서명
군 복무 정보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21년 – 1923년
작품
주요 작품하와이·말레이 해전
고지라 (특수 기술)
울트라맨 (감수)
전체 작품 목록전체 목록
수상
수상 내역6회 일본 기술상
3회 일본 촬영 감독 협회상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쓰부라야 에이지 공식 웹사이트
기타 정보
별칭특촬의 아버지
특촬의 신
일본의 괴수왕
로마자 표기Tsuburaya Eiji

2. 생애

쇼와 시대의 특수 촬영 기술의 1인자였던 쓰부라야 에이지는, 독자적인 기술로 특촬 영화계에 큰 공헌을 하여 '''특촬의 신'''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일생은 활동 사진이라 불리던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영화의 사양기를 맞이한 도호 해체까지의 일본 영화 역사와 겹쳐진다.

쓰부라야 에이지의 가족은 모두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세례명베드로였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후추시의 가톨릭 후추 묘지에 있다.

1957년 도호 특촬 영화 《지구 방위군》 등에서는 '''쓰부라야 에이지'''라는 표기명으로 크레딧에 올랐다. 초기와 종전 후 일시적으로는 본명으로도 활동했는데,[1] 종전 후 본명 명의는 전쟁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2]

2. 1. 유년 시절 (1901년 ~ 1919년)

기모노를 입은 어머니가 갓난 아기를 안고 있다.
츠부라야 에이지가 어머니 세이와 함께, . 세이는 둘째 아들을 낳은 직후 병으로 사망했다.


쓰부라야 에이지(圓谷 英二)는 1901년 7월 7일 후쿠시마현 이와세군 스카가와시에 있는 "오쓰카야"라는 상가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그의 가족은 엿기름 사업을 했다. 그는 이사무 시라이시와 세이 츠무라야의 장남이었으며, 대가족을 이루었다. 츠부라야가 세 살 때, 그의 어머니 세이는 둘째 아들을 낳은 직후 19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했다. 세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시라이시는 그녀와 사후 이혼하고 가족을 떠났으며, 츠부라야는 할머니 나츠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나츠를 통해 츠부라야는 에도 시대 화가인 아오도 덴젠과 관련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에 판화서양화를 들여왔으며, 츠부라야는 그로부터 그의 손재주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삼촌 이치로(세이의 남동생)[2]는 그보다 다섯 살 위였고, 그에게 형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츠부라야는 에이이치("이치"는 맏이를 의미) 대신 에이지("지"는 둘째를 의미)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08년, 그는 스카가와에 있는 다이이치 진조 고토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곧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년 시절, 츠부라야는 일본 비행사들의 최근 성공으로 인해 비행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곧 취미로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평생에 걸쳐 추구할 관심사였다.

1913년, 츠부라야는 사쿠라지마 화산 폭발 장면이 담긴 첫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 자체보다 영사기에 더 매료되었다. 1958년, 츠부라야는 ''키네마 준보''에 영사기에 극도로 매료되어 "장난감 영화 뷰어"를 구입하고, "말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잘라내어, 스프로킷 구멍을 만들고, [종이에] 프레임별로 막대 인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영화 스트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그의 수공예 기술로 인해 그는 지방 유명 인사가 되었고, 福島民友|후쿠시마 민유일본어의 인터뷰를 받았다.

1915년, 14세의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족에게 하네다 공항에 있는 일본 비행 학교에 입학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1917년 학교 설립자 타마이 세이타로의 사고사로 학교가 폐쇄된 후, 츠부라야는 도쿄 간다 전기 공학 학교(현재 도쿄 전기 대학)로 전학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장난감 회사 우츠미에서 발명가로 일하기 시작했고, 최초의 통화 가능한 배터리 구동 전화, 자동 속도 사진 박스, "자동 스케이트" 및 장난감 전화를 포함한 발명품을 고안했다. 후자 두 가지는 그에게 특허 수수료를 안겨주었다.

2. 2. 영화계 입문과 초기 활동 (1919년 ~ 1937년)

1919년 18세에 전기 학교를 졸업한 쓰부라야는 "자동 스케이트"와 "장난감 전화" 등의 발명품으로 500JPY이라는 거액의 특허료를 받았다. 이를 기념하여 아스카야마에서 벚꽃놀이를 하던 중, 함께 간 장난감 회사 직공들이 옆자리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4] 쓰부라야는 이 싸움을 중재하다 천연색활동사진 주식회사(천활)의 에다마사 요시로에게 인정받아 영화계에 입문, 카메라맨을 지망하게 되었다.[5],[6],[7],[8],[9],[10],[11],[12],[13],[14] 같은 해, 천활의 영화 『애수의 곡』 타이틀 부분을 촬영했다.[11]

1920년 천활이 국제활영(국활)에 흡수 합병되면서 국활 스가모 촬영소에 입사했다.[15],[16],[11],[14] 국활에서 카메라맨 조수로 일하던 쓰부라야는 비행기를 이용한 공중 촬영을 자원하여 성공, 단기간에 카메라맨으로 승진했다.[13],[14]

1921년 아이즈와카마츠 보병 연대에 징병되어 통신반에 배속되었다.[11],[14] 1923년 제대 후, 가업을 이으라는 조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상경, 관동 대지진으로 궤멸된 도쿄의 촬영소 대신 국활에 복귀하여[14] 『연명원의 꼽추 남자』를 촬영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국활의 쇠퇴로 미공개되었다.[17],[18]

1924년 각 영화 촬영소가 교토로 이전하면서 쓰부라야도 교토로 이주, 오가사와라 메이호의 오가사와라 프로덕션에 들어갔다.[19] 1926년 이노우에 사다유키, 스기야마 고헤이 등이 이노우에 영화 연맹(쇼치쿠 산하)을 설립하자 연맹에 소속되어[11],[14] 『미친 페이지』의 촬영 조수를 맡았다.[15],[11] 술을 마시면 "테헤라테헤라" 웃는 쓰부라야에게 이노우에는 "테헤라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927년 하세가와 카즈오의 첫 주연작 『어린이 검법』(감독: 이누즈카 미노루)에서 카메라맨을 담당,[20],[11],[14],[21] 다중 오버랩 등 특수 촬영 기법을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13],[14],[21] 1928년 쇼치쿠 교토 시모가모 촬영소에 정식 카메라맨으로 입사, [11],[13],[14] 『괴도 사마』를 촬영했다.[11] 스기야마 고헤이와 함께 『십자로』(이노우에 사다유키 감독)를 촬영했지만, 진보적인 촬영 기법은 기존 배우들의 반발을 샀다.[13]

1930년 사비로 이동 촬영차와 목제 촬영용 크레인을 제작, [14] 부감 촬영 중 추락 사고를 당했다. 이 때 간호를 해준 아라키 마사노와 결혼하여[22] 시모가모 촬영소 뒤편에 신혼집을 차렸다. 1931년 이노우에 사다유키 감독의 귀국 후 첫 작품인 『여명 이전』을 스기야마 고헤이와 공동 촬영하며[11],[14] 일본 최초로 호리존트 촬영을 했다.[14] 같은 해 4월 23일, 장남 하지메가 태어났다.[11]

쓰부라야는 "아이리스 인", "아이리스 아웃",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 "가짜 야경" 등의 촬영 기법을 일본 최초로 사용하고, 배경에 매트화를 합성하거나 미니어처를 활용하는 등[14] 이후 특촬 기술의 기반을 다졌다. 발밑에서 연기를 내 현장감을 높이는 기법을 즐겨 썼으며, 급여의 절반을 촬영 기술 연구에 투자하고 협력자들에게 술을 대접했다.

그러나 하세가와 카즈오의 얼굴을 리얼하게 검게 비춘 촬영 기법 때문에 사내와 배우들의 반발을 사, B급 영화 촬영만 맡게 되고 조명마저 제한받았다. 당시 시대극은 가부키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영화적 리얼리티보다는 배우의 흰 얼굴을 선명하게 비추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14] 쓰부라야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글라스워크"(카메라 앞에 그림을 그린 유리판을 놓는 기법)를 개발하고 정밀한 미니어처 워크를 도입했다.[17],[14]

한편, 연구 자금과 생활비를 위해 현상 기술을 활용한 "30분 사진 박스"를 시조 거리의 다이마루 백화점에 판매, 큰 인기를 얻었다. 쓰부라야는 직접 사진 박스에 들어가 현상을 하기도 했다.

1932년 "쓰부라야 에이지"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3],[14] 5살 연상의 숙부 이름이 "이치로"였기 때문에 "에이지"로 했다고 한다.[11],[14] 같은 해, 스기야마 고헤이의 주도로 사카이 히로시, 아오카와 미치오, 요코타 타츠유키, 타마이 마사오 등과 일본 카메라맨 협회를 결성했다. 11월, 이누즈카 미노루와 함께 닛카츠우즈마사 촬영소로 스카우트되었다.[24],[11],[18],[13],[14]

1933년 닛카츠 입사 첫 작품으로 오코치 덴지로의 『나가도스 풍경』을 촬영했다.[23] 같은 해, 영화 『킹콩』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필름을 입수, 한 코마씩 분석하며 특수 효과를 연구했다.[27],[11],[14] 그 해 말, 닛카츠 촬영소에 설치한 스크린 프로세스 설비 테스트는 실패로 끝났다.

1934년 『아사타로 아카기 아라시』에서 이치카와 도도노스케의 얼굴에 로키 조명(키 라이트)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닛카츠 상층부와 대립, 퇴사했다. 쓰부라야는 버스터 키튼에 빗대 "로 키튼"이라고 불렸다. 같은 해, 오사와 요시오의 권유로 토호의 전신인 JO 토키로 이적, 촬영 기술 연구소 주임이 되었다.[28],[18],[11],[13],[14] 10월, 『백만 명의 합창』에서 자신이 설계한 철제 크레인을 완성, 촬영에 사용했다.[29],[11]

1935년 2월부터 8월까지 연합 함대 연습함 "아사마"에 승선, 하와이,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를 돌며 연습생들의 실습을 담은 장편 기록 영화 『적도를 넘어』를 연출했다.[11],[14] 이것이 그의 첫 감독 작품이었다.[11],[14] 5월 10일에는 차남 사토시가 태어났다.[23] 마사오카 켄조와 함께 인형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영화 『카구야 공주』를 촬영했다.[30],[15],[11],[14]

1936년 나치 독일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지시로 제작된 일독 합작 영화 『새로운 땅』에서 일본 최초로 스크린 프로세스 기술을 사용했다.[31],[26] 이 영화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아르놀트 팡크 감독 등 독일 스태프들은 정교한 미니어처로 표현된 천재지변 장면에 감탄했다.[12] 팡크는 쓰부라야가 교토 시절부터 개발해 온 스크린 프로세스 장치를 독일에 가져가고 싶다며 양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같은 해, 『일본 스키 발달사』를 팡크의 스태프들과 촬영했지만, 미편집 상태로 공개되지 못했다. 또한, 이치마루 주연의 『소우타 이소 새 사냥꾼 오이치』에서 감독으로 데뷔, 촬영과 편집을 모두 담당했다.[17]

1937년 이후의 활동은 다음 섹션에서 다룬다.

2. 3. 도호 입사와 태평양 전쟁 (1937년 ~ 1945년)

1937년, 코바야시 이치조는 영화 스튜디오 P.C.L. 스튜디오와 P.C.L. 영화사를 J.O. 스튜디오와 합병하여 영화 및 연극 제작 회사 토호를 설립했다. 영화 프로듀서 모리 이와오|森岩雄일본어는 토호의 제작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할리우드 투어 중 특수 효과의 중요성을 인식한 모리는 1937년 츠부라야를 도쿄에 있는 회사 스튜디오에 고용하여 1937년 11월 27일에 특수 효과 부서를 설립하고 그를 부서장으로 대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츠부라야는 연구 예산을 받아 일본 최초의 옵티컬 프린터를 만들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으며, 그 기기를 설계했다.[1] 토호에서 츠부라야의 첫 번째 영화 배정에는 구마가이 히사토라가 연출한 시대극 영화 《아베 일족》과 미개봉 선전 뮤지컬 《난고 소령의 노래》(둘 다 1938년작)가 포함되었다. 후자의 영화는 츠부라야가 연출하고 촬영했으며, 그해 9월 6일에 완성했다.[2]

1939년, 그는 육군 항공대의 구마가야 항공 아카데미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비행 훈련 영화를 촬영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상사들은 그의 공중 사진에 감명을 받아 츠부라야는 아카데미에서 3년 가까이 재직하면서 더 많은 임무와 석사 자격증을 받았다.[3] 1939년 11월, 츠부라야가 비행 학교에 다니면서 토호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토호의 특수 예술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한 달 후, 그는 토호의 새로 설립된 교육 부서를 위해 과학 영화를 촬영하도록 위촉되었다. 정부의 요구에 따라 토호는 선전 영화 제작을 유지해야 했다. 이에 따라 1940년 5월, 츠부라야는 토호 교육 영화의 지부인 토호 국책 영화 협회를 위해 다큐멘터리 《일본의 황도》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토지 키무라의 《해군 폭격 부대》에서 미니어처 비행기를 사용한 폭격 장면을 포함하여 특수 효과에 대한 최초의 크레딧을 받았다.[5][6] 《해군 폭격 부대》는 60년 이상 유실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영화의 미완성 사본이 발견되어 2006년에 상영되었다.[7]

1940년 9월, 아베 유타카의 《타오르는 하늘]》이 일본 극장에 개봉되었다. 츠부라야는 이 영화의 특수 효과를 담당했으며 일본 영화 촬영 감독 협회로부터 첫 번째 상을 받았다.[13] 그의 다음 작품인 《손 고쿠》는

2. 4. 전후 활동과 고질라 탄생 (1946년 ~ 1954년)

1945년 3월 10일, 쓰부라야와 그의 가족은 도쿄 대공습 동안 2시간 동안 거주지의 방공호로 피난했다. 이 공격 동안 그는 아이들을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 동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해 말, 쓰부라야는 사이토 토라지로의 ''도쿄에서 온 다섯 남자''에서 특수 효과를 담당했으며, 이 영화에서는 "쓰부라야 에이이치"로 이름이 올라갔다. ''도쿄에서 온 다섯 남자''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도쿄로 돌아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실업 상태로 어려움을 겪는 다섯 남자에 대한 코미디 영화이다.[12]

도호는 도쿄 대공습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세이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점령으로 인해 영화 제작 편수가 줄어들었다. 1946년에 18편의 영화만 제작되었으며, 쓰부라야는 그 중 8편에 참여했다. 같은 해에 쓰부라야는 도호 특수 촬영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고, 촬영, 합성, 미술 및 개발 부서를 설립했다. 영화 작업량이 적었기 때문에 매트 페인팅과 광학 프린팅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후반, 도호는 스튜디오에서 발생한 세 차례의 주요 노동 분쟁으로 인해 해산될 위기에 처했다. 쓰부라야 아키라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파업과 분쟁 동안 일본 경찰과 미군 탱크를 피해 몰래 일터로 가야 했다. 경찰을 격퇴하기 위해 노동자 파업 시위대는 회사 특수 효과 부서가 제작한 대형 팬을 바리케이드로 세웠는데, 여기에는 쓰부라야가 전쟁 중에 사용했던 제로 전투기 엔진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신도호가 설립되었고, 쓰부라야는 이 스튜디오의 첫 영화인 ''도호와 함께 한 천일야화''(1947)의 특수 효과를 만들었다.[13]

1948년 3월 말, 쓰부라야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선전 영화에 참여한 혐의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도호에서 숙청되었다. 미 점령 당국은 그가 ''하와이에서 말라야까지의 해상 전쟁''에 등장하는 종합적인 미니어처를 제작하면서 기밀 문서에 접근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그를 추방했는데, 이는 그를 스파이로 부정확하게 결론 내리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도호는 특수 효과 부서를 해산했고, 쓰부라야는 아들 쓰부라야 하지메와 함께 독립 특수 효과 회사인 쓰부라야 특수 기술 연구소를 설립했다. 비공식적인 법인이었다. 이후 그는 도호 외 주요 영화 스튜디오에서 크레딧 없이 일했다.

쓰부라야의 ''투명인간 나타나다'' (1949)의 효과는 유니버설 픽처스의 ''투명인간'' 영화 시리즈보다 우수하도록 의도되었다.


1949년, 쓰부라야가 특수 효과를 담당한 5편의 주요 다이에이 영화가 일본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일본 호러 영화 제작자 카토 빈의 ''백발마녀'', 키무라 케이고의 ''너구리 궁궐의 꽃'', 우시하라 키요히코의 ''무지개 남자'', 노부치 아키라의 ''유령 열차'', 그리고 아다치 노부오의 ''투명인간 나타나다''가 그것이다. ''투명인간 나타나다''는 일본 최초의 성공적인 SF 영화이자, H. G. 웰스의 소설 ''투명인간''을 처음으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1933년 동명의 영화를 연구하여 제작되었으며, 다이에이는 이 영화가 쓰부라야의 본격적인 전후 복귀작이 되기를 바랐으며, 유니버설 픽처스의 ''투명인간'' 영화 시리즈보다 더 우수한 특수 효과를 선보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쓰부라야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에 실망했고, ''투명인간 나타나다''가 완성된 후 다이에이 직원이 되려는 야망을 포기했다.

1950년, 쓰부라야는 쓰부라야 특수 기술 연구소의 일부 장비와 직원을 도호 본사로 이전했다. 그의 독립 회사는 도호 스튜디오 내에서 겨우 여섯 개의 다다미 매트 크기였다. 같은 해, 그는 도에이의 반전 영화 ''바다의 목소리를 들어라''를 포함하여 다른 회사의 영화에 대한 특수 효과 감독을 계속했다. 회사의 특수 예술 부서를 천천히 재건하는 동안,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도호 영화의 모든 타이틀 카드, 예고편 및 로고를 촬영했다. 쓰부라야가 도호로 복귀한 후 주요 기여를 한 첫 번째 작품은 이나가키 히로시가 연출하고 일본 검객 사사키 코지로의 삶을 바탕으로 한 1950년 영화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동안 타니구치 센키치의 반전 영화 ''새벽의 탈출''(1950)과 같은 도호 영화에도 참여했으며, 타니구치의 ''愛と憎しみの彼方へ|아이토조오시미노카나타에일본어''의 특수 효과를 연출했으며, 이나가키 히로시의 ''海賊船 (1951年の映画)|가이조쿠센일본어''에서 전투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미니어처 선박을 배치했고, 미조구치 겐지의 ''무사시노 부인''의 특수 효과를 연출했다.

1952년 2월, 쓰부라야의 공직 추방이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같은 달, 혼다 이시로의 두 번째 장편 영화 ''남쪽의 피부''가 일본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쓰부라야는 이 영화의 태풍과 산사태 장면의 특수 효과를 연출했는데, 이는 미래의 ''고질라'' 감독의 영화에서 특수 효과 감독으로 활동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해 늦게 ''항구에 온 남자''에서 혼다와 프로듀서 다나카 도모유키와 협력했는데, 이는 ''고질라''의 제작자로 여겨지는 세 사람이 서로 협력한 첫 번째 사례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도호는 3D 영화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토비전"이라고 알려진 3D 영화 프로세스를 완료했다. 이 프로젝트는 포기되었지만, 3D 영화 ''부와나 데빌''(1952)이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회사는 미래의 ''고질라'' 공동 작가인 무라타 타케오의 ''飛び出した日曜日|도비다시타니치요비일본어'' (1953)를 첫 3D 영화로 제작했다. 이 영화는 쓰부라야가 촬영한 것으로, 그는 인터로킹 카메라를 사용하여 단편 영화를 촬영했다. ''도비다시타니치요비''가 완성된 후, 무라타는 쓰부라야가 전년에 고안한 거대한 고래가 도쿄를 공격하는 ''괴수'' 영화 제작에 대해 논의했다. 쓰부라야는 이 작품의 구상을 프로듀서 모리 이와오에게 다시 제출했다. 이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요소들이 이듬해 ''고질라''의 초기 초고에 포함되었다.

쓰부라야의 다음 프로젝트인 전쟁 서사시 ''태평양의 독수리''(1953)는 혼다 이시로와의 첫 번째 중요한 파트너십이었다. 이 영화는 ''하와이에서 말라야까지의 해상 전쟁''의 많은 특수 효과 시퀀스를 특징으로 했기 때문에, 쓰부라야는 소수의 스태프만 사용하여 새로운 특수 효과를 촬영했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도호의 전후 작품 중 1억 (278000USD) 이상을 벌어들인 첫 번째 작품이 되었다. 이듬해, 그와 혼다는 또 다른 전쟁 영화인 ''굿바이 라바울''을 협력하여 1954년 2월 일본 극장에서 개봉하여 보통 정도의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특수 효과는 ''태평양의 독수리''보다 더 발전했는데, 더 많은 기술적 접근 방식과 합성이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의 독수리''와 ''굿바이 라바울''의 성공으로 인해, 다나카 도모유키는 쓰부라야가 혼다와 더 많은 ''특수 촬영''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쓰부라야의 다음 영화는 일본 최초의 글로벌 히트작이 되었고 그에게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2. 5. 국제적 명성과 텔레비전 진출 (1955년 ~ 1969년)

울트라 Q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TBS는 1966년 6월 2일 다큐멘터리 시리즈 《현대 지도자》의 "울트라 Q의 아버지" 에피소드를 방영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쓰부라야는 일터와 그 외 장소에서 촬영되었으며, 《울트라 Q》 괴물 의상을 입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울트라 Q》 후속으로 새로운 쇼를 작업하고 있다고 처음 언급했는데, 이는 나중에 《울트라맨》으로 밝혀졌다.

쓰부라야는 전년 가을부터 새로운 《특촬》 시리즈 작업을 시작했다. TBS 임원들은 《울트라 Q》만큼 성공적인 시리즈를 제작하고 "괴물 라인을 다음 단계로 끌어올릴" 풀 컬러 프로그램을 원했다. 쓰부라야와 작가 긴조 테쓰오는 민간인과 과학자들이 괴물과 실랑이하는 《울트라 Q》의 기본적인 컨셉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새로운 쇼의 초점으로 《괴수》와 초자연 현상을 다루기 위해 결성된 "과학 수사대"(SIA)라는 가칭의 그룹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또한 《울트라 Q》와 《WoO》의 미사용 컨셉을 추가하기로 합의했다. 쓰부라야는 《고질라》 영화를 위해 모델을 제작하는 데 상당한 스튜디오 비용을 썼기 때문에 TBS는 이러한 미니어처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고질라》 프랜차이즈의 세트와 의상을 재활용할 수 있는 작업을 찾고 있었다.

쓰부라야와 배우 후루야 빈(울트라맨 슈트 착용), 1966년경


디자인 과정에서 쓰부라야는 주인공 디자인의 초기 버전이 "너무 외계적이고 불길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대본이 동시에 쓰여지는 동안 프로덕션 디자이너 나리타 토루에게 추가 디자인을 계속 스케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리타는 《카오스》의 컨셉에서 영감을 받은 이전의 《울트라 Q》 디자인과 대조적으로 울트라맨 디자인을 그리스의 《코스모스》(질서와 조화) 개념에 기반을 두기로 결정했다. 쓰부라야는 나리타의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고, 일부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예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울트라맨의 은색 피부는 성간 로켓의 강철을 상징했고, 붉은색 선은 화성의 표면을 나타냈다. 전기 작가 오거스트 라곤에 따르면 울트라맨은 쓰부라야의 "가장 인기 있고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울트라맨》 촬영은 1966년 3월에 시작되었고, 제작진은 실사 및 특수 효과를 위해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쓰부라야 프로덕션과 TBS는 처음에 1966년 7월 17일에 시리즈를 방송할 계획이었지만, 후자는 그 주에 방송하기로 결정했다. 쓰부라야는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 제작을 감독했고, 18화와 19화의 사실상 특수 효과 감독을 맡았다.

두 회사와 스폰서 간의 몇 차례 회의 끝에, 원래 "울트라맨 이브 축제"로 기획되었던 파일럿 에피소드가 쇼의 타이틀 캐릭터를 소개하기로 결정되었다. 파일럿 에피소드는 그해 7월 10일에 방영되었는데, 이는 쓰부라야의 생일로 인용된 날짜 중 하나이며, 《울트라맨의 탄생: 울트라맨 초연 기념》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울트라맨》은 전작보다 더 큰 히트를 쳐서 4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제 집에서 매주 괴물을 볼 수 있게 되면서, 아이들은 부모에게 극장에 데려다 달라고 요청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텔레비전 성공은 도호의 《괴수》 영화에서 흥행 수입을 전환시켰다.

1966년, 쓰부라야는 헨리 G. 사퍼스타인과 공동 제작하여 두 명의 거대한 털이 많은 휴머노이드가 도쿄에서 결국 서로 싸우는 모습을 다룬 《괴수 영화 가르간츄아의 습격》을 위해 혼다 이시로와 다시 한 번 함께 작업했다. 처음에는 《프랑켄슈타인 대 바라곤》의 속편으로 기획되었으며, 대본 제작 과정에서 여러 가제를 거쳤고, 최종 영화는 영화 연대기 작가 스튜어트 갤브레이스 4세에 의해 전작의 "준 속편"으로 언급되었다. 이 영화는 1966년 7월 일본에서 초연되었다.

쓰부라야의 시리즈 《부스카, 우정의 괴수》가 1966년 11월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후, 그는 《고지라 2세》를 시작으로 아리카와 사다마사에게 《고질라》 영화 시리즈의 특수 효과 감독 자리를 "특수 효과 감독"으로 임명하고 넘겨주었다.

다음 해, 쓰부라야는 도호의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일본-미국 합작 영화 《킹콩의 역습》의 효과를 감독했다. 킹콩 (1933)의 공룡 싸움 장면을 오마주하여, 이 감독은 영화 속 몬도 섬에서 콩과 싸우는 공룡 《괴수》인 고로자우르스를 소개했다. 쓰부라야의 기여가 담긴 1967년 개봉작은 《울트라 세븐》으로, 《울트라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었으며, 영국의 TV 시리즈 《썬더버드》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리즈는 1967년 10월 7일 첫 방송을 시작하여 33.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1967년,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집필진은 세키자와 신이치의 각본인 《비행 전함》에서 요소를 가져와서, 제임스 본드와 해저 여행과 개념이 유사한 TV 시리즈인 《마이티 잭》에 삽입했다. 부유한 사업가가 군사 조직의 행위에 맞서기 위해 설립한 비밀 요원 팀에 관한 내용인 "Q"는 《울트라》 시리즈와 《부스카 더 프렌들리 비스트》와는 달리 더 성숙한 시청자를 대상으로 했다. 후지 TV의 압력으로 인해, 1968년 4월 6일 첫 번째 에피소드가 방영된 후 시리즈는 빠르게 쇠퇴했다. 이는 낮은 품질 때문이었다. 많은 텔레플레이가 수정 없이 촬영되었고, 특수 효과 작업에 시간이 부족했으며, 재촬영은 종종 불가능했다. 후지 TV는 이 시리즈가 시청률 8.3%를 기록하여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간주했으며, 쓰부라야 프로덕션이 예정된 26개의 에피소드 중 13개만 제작했을 때 시리즈를 취소했다. 1968년 7월에는 이 시리즈의 속편인 《파이트! 마이티 잭》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예산이 증가하고, 참여하는 제작진이 줄어들고, 영화 관람객들이 텔레비전으로 쏠리면서, 프로듀서 다나카 도모유키는 《고질라》 시리즈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지만, 오리지널 제작진을 위해 마지막 영화를 제안했다. 혼다 이시로의 후속 《괴수》 서사시 《괴수 총진격》(1968)은 아리카와 사다마사가 감독한 특수 효과를 특징으로 하며, 쓰부라야가 이를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그의 다음 작품은 마루야마 세이지의 또 다른 전쟁 서사시인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미후네 도시로가 일본 제국 해군 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을 맡았다(야마모토는 이전에 혼다와 쓰부라야의 《태평양의 독수리》의 주제이기도 했다). 《괴수 총진격》은 1968년 국내 영화 흥행 12위를 기록하며 약 1.7억의 수익을 올렸고,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약 4억으로 2위를 기록했다. 1968년 9월 15일, 《울트라세븐》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방영되고,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도호에 의해 일본 극장에 배급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후, 쓰부라야 프로덕션을 위한 그의 다음 프로젝트인 《괴기 대작전》이 TBS에서 방영되기 시작했고, 그는 이 쇼의 감독으로 활동했다.

1969년 7월 도호가 개봉한 《위험한 영점》은 도호와 돈 샤프 프로덕션의 합작 일본-미국 영화였다. 이 영화는 3.6억의 예산(약 100만달러)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쓰부라야의 부서는 미국의 프로듀서가 프로젝트에서 철수한 후 영화에 사실적인 생물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회고적인 작가들은 쓰부라야의 모형 작업, 특히 잠수함에 대해 찬사를 보냈는데, 제리 앤더슨의 동명 쇼에 등장하는 《썬더버드》 머신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 《위험한 영점》은 1.7억 (47.2만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데 그쳐 흥행에 실패했다.

쓰부라야는 다음 프로젝트인 《일본해 해전》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이 영화는 "도호 8.15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로 여겨진다(《일본의 가장 긴 하루》와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이어). 쓰부라야는 마루야마 세이지가 감독한 러일 전쟁에 관한 전쟁 서사시 영화에 대해 사상 최대의 예산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부서의 예술가 60명이 이 영화를 위해 약 107척의 선박 미니어처를 제작했고, 다른 3미터 선박과 대조적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전함 《미카사》의 13미터 모형을 제작했다. 1969년 8월에 개봉된 《일본해 해전》은 1969년 일본 흥행 2위를 기록하며, 3.6억의 수익을 올렸다. 3.5억의 예산으로 제작되었다. 쓰부라야의 걸작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일본해 해전》은 그가 특수 효과 감독으로 공식적으로 참여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같은 달, 쓰부라야 프로덕션의 다음 시리즈인 《공포 극장 언밸런스》(1973년 방영)가 제작 과정에 들어갔고, 쓰부라야는 이 작품의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쓰부라야와 도호의 여러 특수 효과 제작진은 1969년 대부분을 함께 보내며 오사카부 스이타에서 열린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미쓰비시 그룹 전시관에 전시될 지진과 화산을 시뮬레이션하는 시청각 전시인 《일본 열도의 탄생》을 제작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전념했기 때문에 《고질라·미니라·가바라 올 괴수 대진격》(1969) 제작에 참여할 수 없었고, 혼다 이시로 감독이 처음으로 그를 대신하여 특수 효과를 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쓰부라야가 "편집에 개인적으로 참여했다"고 말하며, "영화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제작되었을 수 있지만, 그는 확실히 검토하고 특정 장면을 단축하라는 지시 등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2. 6. 사망과 유산 (1970년)

후추시 가톨릭 묘지에 있는 쓰부라야의 묘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의 작업량 감소 권고를 무시한 채, 쓰부라야는 불안정 협심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영화 프리젠테이션 촬영 세션 동안 나루토 소용돌이를 방문하던 중 쓰러졌다.[43] 그 후 회복을 위해 메구로구의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일본 열도의 탄생》을 예정대로 완료할 것을 기대하며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이토시이즈반도에 있는 우키야마 별장에서 회복하고 치료를 받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과제를 취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츠부라야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며, 그의 아들 하지메는 TBS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1969년 11월 30일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사장직을 공식적으로 이어받았다.

1969년 12월, 쓰부라야는 엑스포 '70 프로젝트 촬영을 완료하고 아내 마사노와 함께 우키야마 별장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자서전과 영화 개요인 《일본 비행기 아저씨》와 《카구야 공주》를 계속 집필했다.[43] 매일 《일본 비행기 아저씨》 스토리 트리트먼트를 계속 쓰면서, 그는 미래에 더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1970년 1월 26일 도쿄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1970년 1월 25일 오후 10시 15분, 마사노는 잠에서 깨어나 이토시 별장에서 쓰부라야가 자신과 함께 잠을 자다가 사망한 것을 발견했다. 향년 68세였다. 일본 자료는 그의 사망 원인을 천식 발작과 관련된 협심증으로 언급했다.[43]

1월 27일, 쓰부라야 가족의 집에서 애도 행사가 열렸다. 그의 장례식은 1월 29일 세이조 가톨릭 교회에서 열렸으며, 장남 하지메가 상주를 맡았다. 다음 날, 그는 일본 촬영 기사 협회로부터 명예 회장상을, 쇼와 천황으로부터 서보장을 사후에 수상했다. [5] 2월 2일, 가톨릭 예배가 도호 스튜디오에서 열렸으며, 《라스트 워》 프로듀서 후지모토 사네즈미가 집례했다.[43] 배우 하세가와 가즈오, 《하와이에서 말라야까지의 해전》 감독 야마모토 가지로, 《세 개의 보물》 감독 이나가키 히로시, 《도호와 함께한 천 하룻밤》 감독 이치카와 곤 등 500명의 친구와 동료가 이 예배에 참석했다. 그는 나중에 일본 후추시의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쇼와 시대의 특수 촬영 기술의 1인자이며,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기술로 특촬 영화계에 다대한 공적을 남긴 것으로부터, '''특촬의 신'''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인생은 활동 사진이라고 불린 메이지 시대의 여명기부터, 영화 사양기를 맞이한 도호 해체까지의 일본 영화계의 역사와 겹쳐진다.

일가는 전원 가톨릭 신자로, 에이지의 세례명베드로이다. 묘소는 도쿄도후추시의 가톨릭 후추 묘지에 있다.

3. 영화 제작

인도네시아 정부와 ''영광의 그림자 속에서''의 재협상에 실패한 프로듀서 다나카 도모유키는 외젠 로리에의 ''2만리 해저 괴물''(1953)과 ''제5복룡환''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거대 괴수(또는 ''괴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는 이전 괴수 영화의 재정적 성공과 핵 불안을 만들어낸 뉴스의 영향으로 상당한 잠재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프로젝트의 개요를 작성하여 모리 이와오에게 제안했고, 쓰부라야가 특수 효과 제작에 동의한 후, 모리는 1954년 4월 중순에 ''고질라''라는 제목으로 제작을 승인했다. 영화 제작자 혼다 이시로가 곧 연출을 맡았다. 사전 제작 중 쓰부라야는 스톱 모션을 사용하여 괴수를 묘사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코스튬 방식"을 사용해야 했다. 이 기술은 현재 "수트메이션"으로 알려져 있다.

쓰부라야의 특수 효과 부서는 1954년 8월부터 10월 말까지 71일 동안 ''고질라''를 촬영했다. 그는 제작진과 함께 매일 오전 9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에 준비하고 다음 날 오전 4시 또는 5시에 촬영을 마치는 강도 높은 작업을 했다. 11월 3일 전국 개봉에 맞춰 쓰부라야의 특수 효과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그 결과 ''고질라''는 토호를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특수 효과 회사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쓰부라야는 이 작품으로 첫 일본 기술상을 받았다.

1954년 10월, ''고질라''를 완성한 직후, 쓰부라야는 ''보이지 않는 맹수'' 작업에 들어갔다. 이 영화는 1954년 12월에 일본 극장에서 ''투명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이 ''특촬'' 영화는 오다 모토요시가 감독하고, 쓰부라야가 특수 효과 및 촬영을 담당했다. 그는 ''투명 인간 나타나다''(1949)에서 사용된 기술을 상속하고 확장했다. 쓰부라야는 제작진에게 광학 합성 기술을 포함하여 영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제목 캐릭터의 투명성을 묘사하도록 지시했고, 캐릭터가 광대 복장을 하여 투명 능력의 정체를 숨길 것이라고 제안했다.

쓰부라야가 고질라 수트 배우 나카지마 하루오에게 ''고질라의 역습''(1955) 세트장에서 지시하고 있다.


''고질라''의 흥행 성공으로 토호는 속편인 ''고질라의 역습''을 제작했다. 쓰부라야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특수 효과 감독이라는 직함을 받았다. 3개월도 안 되어 촬영된 이 영화는 1955년 4월에 개봉했다. 한 달 후 쓰부라야는 혼다 이시로 감독과의 두 번째 ''괴수'' 영화 협력 작품인 ''반인간''의 특수 효과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특히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후방 스크린 미니어처, 미니어처 눈사태 시퀀스를 제작했다.

1956년 4월, ''고질라''는 미국 전역에 널리 배급된 최초의 일본 영화가 되었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개봉되어 쓰부라야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개봉을 위해 영화는 ''괴수왕 고질라!''로 제목이 바뀌고, 대대적으로 재편집되었으며, 캐나다 배우 레이먼드 버가 출연하는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었다.

쓰부라야의 다음 주요 작품인 ''백사전''은 테크니컬러 (이스터만컬러)로 완전히 촬영된 토호의 첫 번째 ''특촬'' 작품이었다. 쓰부라야와 그의 부대는 특수 효과 촬영 전에 한 달 동안 컬러 프로세스 기술을 훈련했다. ''백사전'' 작업 후 쓰부라야는 토호 로고를 만들었고, 그의 부대는 회사의 대부분의 영화에 오프닝 크레딧을 제작했다. 토호 영화 작업 외에도 닛폰 TV의 시리즈 ''사나다 성 닌자술''과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을 위한 여러 극장 프로덕션의 특수 효과를 제작했다.

토호가 쓰부라야에게 맡긴 다음 과제는 ''라돈''이었는데, 이는 영화 최초의 ''괴수'' 영화였다. ''라돈''의 예산 중 약 60%가 쓰부라야의 특수 효과에 사용되었다. ''라돈''은 다양한 크기의 많은 모델 세트가 필요했다. 이 영화는 1956년 12월 일본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다음 해 미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이전 SF 영화보다 더 많은 흥행 수입을 올렸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성''은 쓰부라야가 1957년에 두 번째로 개봉한 영화였다. 구로사와는 ''거미의 성''을 위해 그가 만든 필름의 양에 불만을 품고 쓰부라야가 만든 여러 장면을 잘라냈다. 다음으로 그는 혼다 이시로가 연출한 SF 서사시 ''우주대작전''의 특수 효과 감독을 맡았다. 이 콤비가 연출한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우주대작전''은 종종 "결정적인 SF 영화"라고 불린다. 쓰부라야는 ''우주대작전''의 와이드 스크린 효과로 또 다른 일본 기술상을 수상했다.

1958년 쓰부라야의 첫 번째 영화 ''H-인간''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인간 변형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는 다음으로 혼다의 ''미지의 거대괴수 바라다''의 특수 효과를 연출했다. 처음에는 텔레비전 영화로 기획되었으나, AB-PT가 제작 중에 붕괴되어 토호는 영화의 지위를 극장 영화로 변경했다. 1958년 쓰부라야가 마지막으로 개봉한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겨진 요새''였다.

쓰부라야는 1959년에 ''우주소년 아톰''의 특수 효과 작업을 시작했다. 1959년 3월 7일부터 1960년 5월 28일까지 방영된 이 쇼 자체에서는 그와 그의 회사가 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았지만, 그는 쓰부라야 특수 기술 연구소에서 그의 직원이 한 미니어처 촬영을 감독했다. 비슷한 시기에 쓰부라야는 혼다의 ''이노: 강철 팔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폭풍 장면의 특수 효과를 연출했으며, 제목 캐릭터의 작은 배를 위한 미니어처를 제작했다. 다음으로 그는 ''손오공''에서 그의 1940년 영화 ''손오공''을 리메이크했다. 쓰부라야는 아내의 된장국 국물에서 된장을 보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폭풍 구름, 연기, 세 개의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재가 있는 장면을 만들었다.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의 ''발리의 이야기''를 제작한 후, 그는 마쓰바야시 슈에이의 ''특수잠수함 이-57 항복하지 않음''의 특수 효과를 연출했는데, 이는 그의 6년 만의 첫 번째 전쟁 영화였다. 영화의 잠수함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첫 번째 토호 미니어처 수영장에 모델 해저 지형이 건설되었다. 그는 또한 영화의 테크니컬러 버전을 위한 특수 효과를 촬영했지만, 최종 버전에서는 흑백으로 변환되었다. 1959년 8월 쓰부라야는 아들 하지메와 노보루와 함께 홍콩 영화 회사를 위해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집의 쓰부라야 연구소에서 두 마리의 용 인형의 영상을 촬영했다.

쓰부라야가 ''삼개의 보물''(1959) 세트장에서 야마타노오로치 소품과 함께 있다.


쓰부라야의 다음 주요 작품은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삼개의 보물''로, 토호의 천 번째 기념 영화로 제작되었다. 특수 효과 감독과 그의 제작진은 미후네 도시로의 스사노오노미코토와 야마타노오로치의 전투, 후지산의 분출 등 영화에 포함된 몇몇 주요 시퀀스를 촬영했다. ''삼개의 보물''에서 쓰부라야는 "토호 버사타일 프로세스"를 처음 사용했다. 이 영화는 토호의 그 해 최고 흥행 영화이자 전체적으로 두 번째로 높은 흥행 영화로 기록되었다. 그는 특수 기술로 일본 기술상을 수상했고, 영화의 날에 특별 공로상을 받았다. 쓰부라야는 ''삼개의 보물''의 성공에 만족했지만, 야마타노오로치 소품의 머리가 피아노 선으로 들린 사진을 보고 실망했다. 그에 따라 그는 그 사진이 "아이들의 꿈을 깬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문과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1950년대 후반에 우주 경쟁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발발했을 때 쓰부라야는 토호에게 달 탐험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도록 조언했다. 따라서 그의 다음 영화인 ''우주의 대결전''은 표면에서 외계인과 싸우는 우주 비행사 그룹에 대한 SF 서사시였다. 쓰부라야는 영화의 달 착륙 시퀀스에서 프로듀서 조지 팔의 ''목표는 달''(1950)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팔을 만날 것이다. 그의 기여가 담긴 영화가 일본 영화에 대한 세계적인 인기와 찬사를 얻음에 따라, 허스트 커뮤니케이션스는 쓰부라야가 ''우주의 대결전''의 특수 효과를 연출하는 것을 촬영했고, 그는 나중에 개봉 전에 네 번째 영화의 날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았다.

1963년, 쓰부라야 에이지는 도호와의 전속 계약을 해제하고, 츠부라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츠부라야 프로덕션은 닛카쓰・이시하라 프로덕션 제휴 영화 『태평양 고독』의 폭풍 특수 촬영 장면을 제작했다.

1964년에는 미일 합작 영화 『용사들만』의 촬영 현장 시찰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다. 또한, 요미우리 랜드의 수중 발레 극장 「용궁」 개장에 맞춰 특수 미술을 담당했다.

1965년, 『태평양 기적의 작전 키스카』와 『괴수 대전쟁』으로 일본 영화 기술상을 수상했다.

1966년에는 츠부라야 프로덕션이 제작한 TV 특수 촬영 프로그램 『울트라 Q』와 『울트라맨』이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1967년, 『킹콩의 역습』이 공개되었다. 또한, 『괴수 섬의 결전 고질라의 아들』에서는 특기 감수가 되어 제자인 아리카와에게 특수 촬영 감독 자리를 양보했다.

1968년,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사명을 변경했다.

1969년, 자신의 마지막 특수 촬영 극장 작품이 되는 『일본해 대해전』이 공개되었다.

3. 1. 스타일, 주제 및 기술

쓰부라야 에이지의 영화 제작 경력은 소규모 시대극 영화에서 시작하여 재정적으로 성공적인 전쟁 영화SF 영화 대작으로 발전했다. 20세기 초 촬영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츠부라야는 혁신적인 스타일을 개선하고 몇 가지 기술을 통합하기 위해 ''로스트 월드''(1925), ''메트로폴리스''(1927), ''킹콩''(1933) 등 국제 영화를 면밀히 연구했다.[1] 츠부라야는 ''킹콩''이 특수 효과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며, 미니어처 효과와 레이어 필름 스트립을 포함하는 합성 기술을 사용하여 영화에 특수 효과 시퀀스를 만들기로 결정했다.[1] 그는 새로운 특수 효과 기술을 끊임없이 변환하고 매일 테스트했으며, 일본 특수 효과(일명 ''특촬'')의 창시자이자 수장이 되어 "특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1] 전기 작가 어거스트 라곤은 그의 영상이 항상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라이브로 촬영되었으며, 컴퓨터 생성 이미지와 같은 현대 기술과 비교하여 "어리석거나 치명적이고, 아름답거나 무서울 수 있지만, 아무리 기발하고 환상적이더라도 그의 시각 효과는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썼다.

''고질라''(1954)를 위해 츠부라야는 영화의 저예산과 빠듯한 일정 때문에 스톱 모션으로 고질라를 묘사하는 것을 제한했기 때문에(à la ''킹콩'') 새로운 슈트 연기 기법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나중에 "슈트 액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 역사가 스티브 라이플은 슈트 액션이 특수 효과 개척자인 윌리스 H. 오브라이언( ''킹콩''의 효과 제작자)과 레이 해리하우젠( ''2만 미터 심해의 괴물''의 효과 제작자)의 스톱 모션 기술만큼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고질라를 유명하게 만든 파괴 시퀀스를 묘사하는 데 더 효과적인 접근 방식을 특수 효과 감독에게 제공했다고 썼다.

영화에서 츠부라야의 노력은 종종 핵 대학살, 세계 대전, 괴물 침략, 그리고 성간 갈등을 묘사했다. 그의 영화는 이러한 묵시록적이고 대량 파괴적인 주제를 특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 관객에게 부적절하다고 믿어 그의 ''괴수 영화''에서 고어—특히 유혈과 학살—의 주제를 포함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토호의 임원(모리 이와오 등)은 츠부라야에게 1960년대 후반에 폭력적인 내용이 증가한 청소년 대상 텔레비전 쇼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그의 ''괴수'' 영화에 고어를 포함할 것을 촉구했으며, 츠부라야 자신의 쇼인 ''울트라맨''과 ''울트라 세븐''조차도 영웅들이 괴물 적들을 참수하거나, 베거나, 자르거나, 기타 부상을 입히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의 제자 나카노 테루요시에 따르면, 츠부라야는 토호 임원들에게 "이 영화는 아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말도 안 돼요. 왜 그들에게 피를 보여주는 것을 즐기십니까?"라고 말했다. 폭력적인 주제를 그의 영화에 담기보다는, 츠부라야는 그의 ''특촬'' 작품에 경쾌한 코미디와 휴머니즘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라이플이 쓴 바와 같이, 이것은 그가 여전히 "마음속에 어린아이"이고 그의 만년에 "아이들에게 마음이 약했기" 때문인 것으로 암시된다. 1962년 츠부라야는 "내 마음과 생각은 내가 어렸을 때와 같습니다. 그때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마법의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소원은 단지 환상의 영화를 보러 갈 사람들의 삶을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아이들에 대한 그의 연민은 그의 유산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특히 그의 사후 나카노가 효과를 담당한 ''고질라'' 영화는 많은 양의 고어 폭력을 보여주었다.

츠부라야는 영화 촬영에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촬영 기사로 일하면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크레인 촬영과 키 라이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카메라 기사 미우라 미쓰오에 따르면, 츠부라야는 또한 맥주병 조각을 필터로 사용하여 "가상 야경"을 촬영했으며, 그의 제자 아리카와 사다마사는 일본 최초로 컬러 필터로 촬영한 사진가가 되었다. 말년에 츠부라야는 촬영 기사 토미오카에게 수동 크랭크 카메라로 얼마나 많은 프레임을 찍을 수 있는지 항상 인지하고 있었고, 본능적으로 그것을 돌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혼다는 츠부라야의 특수 효과 영화 접근 방식이 "새로운 발견을 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물리학 실험과 같았다"고 말했다. 츠부라야의 조명 기사 사이토 가오루는 특수 효과에서의 그의 카메라 작업은 주된 위치가 결정되면 옆으로 움직이거나 크레인으로 위아래로 움직일 뿐, 카메라 자체가 앞으로 접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이토는 또한 그는 피사체가 카메라에 접근하도록 요구했으며 카메라 반대편에서 세트를 촬영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새로운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츠부라야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스타일로 알려져 있었다. 나카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츠부라야 씨가 어느 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다 익숙한 모습의 여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라고 말했죠.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아세요? 바로 그의 아내였습니다! 츠부라야 씨는 자신의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겨 있어서 때로는 자신을 잃곤 했습니다."

아리카와에 따르면, 츠부라야는 자신의 영화 작업을 편집하기도 했다. 츠부라야의 조감독 아사이 마사카츠는 그가 촬영한 컷의 상황과 저장 위치를 기억했다고 말했다. 스크립터 스즈키 케이코는 츠부라야가 자신만의 편집 계획을 구상했고, 종종 대본 없이 장면을 촬영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장면이 "배틀 1"에서 "공중전 2"로 변경되었다.

츠부라야가 특수 효과팀과 함께 영화 ''고질라''(1954) 촬영을 지휘하고 있다. 영화의 고질라는 "슈트 액션"(츠부라야 뒤편)을 통해 묘사되었으며, 이는 핵 대학살을 상징한다.

3. 2. 출연진 및 제작진과의 관계

혼다 이시로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감독들이 쓰부라야와 협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19] 쓰부라야는 자신의 분야에 대한 통제권을 주류 감독에게 양보하지 않았고, 감독이 세트나 카메라 위치 등을 평가할 때 뷰파인더를 보지 못하게 했으며, 자신이 촬영한 분량이 재편집되는 것을 반대했다.[19]

하지만 1954년 영화 고질라 제작 기간 동안 쓰부라야는 혼다와 유대감을 형성했는데, 혼다는 차분하고 예의 바르며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 쓰부라야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9] 두 사람은 도호 스튜디오 밖에서 자주 교류하지 않았고 개인적인 동료도 아니었지만, "쓰-카 관계"를 공유했다고 한다.[19] 혼다의 조감독 카지타 코지는 "이나가키 히로시, 후쿠다 준, 마츠바야시 슈에이와 같은 다른 감독들도 쓰부라야 씨와 함께 일했지만, [...] 감독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수 효과 팀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쓰부라야 씨는 그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혼다-''상''과 쓰부라야 씨는 두 분 모두 매우 성숙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서로 매우 잘 지냈습니다."라고 말했다.[19]

쓰부라야(가운데)와 혼다 이시로(오른쪽) 감독, 그리고 1962년 영화 ''킹콩 대 고질라''의 파로섬 세트에서 촬영 스태프들


쓰부라야는 종종 스태프들에게 가혹한 지시를 내렸지만, 그를 존경하는 동료들이 많았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삼촌", 멘토 또는 "늙은이"라고 불렀다.[21] 고질라 슈트 배우 나카지마 하루오는 쓰부라야가 보통 웃는 얼굴이었고 촬영 현장에서 상쾌한 태도를 보였지만, 종종 스태프에게 화를 냈다고 말했다.[22] 특수 효과 촬영 기사 토미오카 모토타카는 자신이 촬영 기사 사다마사 아리카와를 대신하여 쓰부라야에게 꾸중을 듣는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촬영 보조 타카오 츠루미와 미츠루 초카이는 쓰부라야가 그의 부서의 젊은이들이 실패했을 때 직접 화를 내지 않고 대신 아리카와 등에게 꾸중을 했다고 증언했다.[23]

반대로 쓰부라야는 배우들에게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물었다.[22] 나카지마는 쓰부라야에 관한 전기에서 "세트장에서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 '고질라' 이후 함께 작업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가 했던 방식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덧붙였다: "라돈 슈트의 와이어가 끊어져 제가 미니어처 세트 위로 몇 미터나 떨어졌을 때, 그는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영화를 끝내야 하니까.'라고 꾸짖었습니다."[24] 영화 ''네즈라 1964''(2020)에 대한 인터뷰에서 울트라맨 슈트 배우 후루야 빈은 쓰부라야가 "보통 평범한 사람이었다"며 항상 배우들에게 "아이들에게 꿈을 줄 수 있는 영화에 있는 것처럼 연기하라"고 격려했다고 말했다.[20]

구로사와 아키라와는 당시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거장으로서 적지 않게 의식하는 사이였으며, 서로의 작품 시사회는 두 사람 모두 반드시 관람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작품에 출연한 나카지마 하루오도 구로사와는 특수 촬영을 좋아해서 더빙이나 아후레코를 자주 엿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고질라에서 구로사와로부터 "이번 것은 꽤 좋았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좋아 이 이야기를 가족에게 했다고 하며, 구로사와가 츠바키 산주로를 찍을 무렵에는 "저 녀석은 좋구만. 그렇게 필름을 쓸 수 있는 건 저 녀석 정도밖에 없을 거야"라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구로사와는 공룡 대전쟁 라돈에서는 "특수 촬영 영화에도 계절감이 필요하다"라고 진언, 다나카 도모유키는 얻는 바가 컸다고 말하고 있다. 아리카와에 따르면, 쓰부라야는 7인의 사무라이의 공개 당시 타협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구로사와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한편, 양쪽 팀의 스태프 사이에서는 조명 쟁탈전이나 배우 빼가기 등의 갈등도 있었고, "천황"으로 불리는 구로사와에 대해 "이쪽은 (특수 촬영의) 신이다"라고 되받아치는 스태프도 있었다.

마쓰바야시 무네요와는 서로 "쓰부라야 할아버지", "스님"이라고 애칭으로 부르는 사이였다.

4. 유산

쓰부라야 에이지의 이름과 작품은 그의 ''특수 촬영'' 영화와 텔레비전 쇼가 전 세계적인 팬덤을 형성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현대 작가들은 쓰부라야가 영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자주 언급하며,[21][22] 전기 작가 어거스트 라곤은 쓰부라야의 영화적 중요성이 구로사와 아키라와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The Independent''의 더그 볼튼은 "일본 SF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쓰부라야 작품의 유산을 쉽게 인식할 것이다"라고 썼다.[35] ''The Tokusatsu Network''는 쓰부라야가 "일본 영화 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하며, 그의 유산이 "그의 창작물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그를 월트 디즈니에 비견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라고 밝혔다.[23]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쓰부라야의 ''울트라맨'' 부활 의도는 ''울트라맨 리턴''(1971-1972)으로 구체화되어, 그 후 10년 동안 "''울트라''" 시리즈의 새로운 흐름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쓰부라야 하지메, 쓰부라야 노보루, 쓰부라야 아키라는 쓰부라야 프로덕션을 계속 운영하며, 쓰부라야 프로덕션이 홈 비디오가 ''울트라맨'' 시리즈를 부활시키기 전, 직원 세 명만 남았을 때에도 그의 유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9년, 노보루는 울트라맨이 그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고 선언했으며, 비록 고질라가 해외에서 쓰부라야의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일지라도 말이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쓰부라야의 작품에 대한 감사를 표하거나, 자신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스티븐 스필버그,[24]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코세지, 브래드 피트, 쿠엔틴 타란티노, 스탠리 큐브릭, 존 카펜터, 쓰카모토 신야,[25] 안노 히데아키,[26] 윌 스미스,[27] 크리스 커크패트릭,[28] 기예르모 델 토로,[29] 히구치 신지,[30] 이와이 슌지, 미야가와 가즈오, 그리고 ''진격의 거인''의 작가 이시야마 하지메가 있다.[31] 1970년대 초, 루카스는 쓰부라야가 특수 효과 제작의 강자였기 때문에, ''스타워즈''(1977)의 특수 효과를 제작할 회사를 찾기 위해 도호를 방문했다. 스필버그는 쓰부라야의 ''고질라''가 "모든 공룡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믿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또한 비스티 보이즈의 노래 "[인터갈락틱 (노래)|인터갈락틱]", 시리즈 ''파워 레인저스'', 그리고 영화 ''퍼시픽 림''의 뮤직 비디오에 영감을 준 것으로 언급되었다.[32]

쓰부라야는 쇼와 시대의 특수 촬영 기술의 1인자이며,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기술로 특촬 영화계에 다대한 공적을 남긴 것으로부터, '''특촬의 신'''이라고도 불린다.

2001년, 두 개의 장난감 회사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쓰부라야의 피규어를 배포했다. 2015년 7월 7일, 그의 탄생 114주년을 기념하여, 구글 아티스트 제니퍼 옴과 동료들이 그의 특수 효과 작업을 담은 애니메이션 두들을 만들었다. 이 두들을 통해 사용자들은 쓰부라야의 주요 괴수 영화와 TV 쇼의 장면을 만들 수 있었다.

2019년 1월 11일,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영화와 TV 분야에서의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쓰부라야 에이지 박물관이 그의 고향인 스카가와에 개관했다. 박물관 개관식에서, 하시모토 가쓰야 시장은 이 박물관이 "일본 특수 효과를 세계에 알리는 아카이브 센터"라고 말했다.

그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국립영화 아카이브는 2021년 8월부터 11월까지 쓰부라야 프로덕션과 협력하여 스카가와에서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2022년 7월 10일, 쓰부라야와 그의 시리즈 ''울트라맨''(1966-1967)을 기리는 의미로, 영화 ''신 울트라맨''(2022)의 상영회가 스카가와시 시 문화 센터에서 열렸다. 이 상영회에는 약 950명이 참석했으며, ''신 울트라맨''의 히구치 신지 감독과 주연 배우 사이토 타쿠미가 쓰부라야의 작품 유산에 대해 논의했다.

영화 제작자이자 시각 효과 아티스트인 야마자키 타카시는 그의 2023년 호평작 ''고지라 마이너스 원''에서 쓰부라야의 작품에 경의를 표했다.

5. 수상 및 영예

쓰부라야 에이지는 영화와 특수 효과 분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상을 받았다. 다음은 쓰부라야 에이지의 주요 수상 및 영예 목록이다.

연도부문후보작결과
1940일본 영화 촬영 감독 협회특별 기술상타오르는 하늘수상
1942기술 연구상하와이에서 말레이까지의 해전
1954제8회 일본 기술상특별 기술고질라
1957제11회 일본 기술상특별 기술지구 방위군
1959제13회 일본 기술상특별 기술세 개의 보물
제4회 영화의 날특별 공로상해당 없음
1963제17회 일본 기술상특별 기술신밧드의 잃어버린 세계
1965제19회 일본 기술상특별 기술태평양 기적의 작전 키스카
1966제20회 일본 기술상특별 기술괴수 대전쟁
1970해당 없음제4등 서보장
일본 영화 촬영 감독 협회명예 회장상

[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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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서적 ゴジラ365日 洋泉社 201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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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서적 2022
[136] 웹사이트 “特撮の神様” 円谷英二監督が撮影 「かぐや姫」フィルム発見 https://web.archive.[...] 202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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